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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과학검역원정보지
이 널리 퍼져 신라에서는 불교 전래 다음해인 529년(법흥왕 16년), 백제에서는 599년(법왕원년) 12월
왕명으로 살생을 금하고 민가의 수렵용 매를 풀어주고 수렵용구를 소각하는 등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이념이 나타났습니다. 식육금단 사상 중에서도 특히 개는 부정한 것으로 믿어져 개고기 식용을 엄히
금하였습니다. 또한 예기 등에 나타난 삼국시대의 생활상에는 봄에는 사냥과 제사용 도살도 금하고,
소, 돼지 등을 무고히 살생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신라 성덕왕 4년(705)에는 살생을 금하라
는 왕명이 내려졌으며, 711년(성덕왕 10년)에는 가축의 도살을 금지하는 엄명이 내려졌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가축이 식용으로 사육된 주된 이유는 유교사상으로 맹자에 보면 식육용으로 가축을
기르도록 장려한데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고려시대의 식육문화는 송나라 사신 서극이 고려에 1개월 머무르며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편찬
한 고려도경을 참고해 볼 때 고려는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삼가고 국왕이나 대신들이 아니면 양과
돼지를 먹지 않았으며, 중국 사신들이 올 때에 접대용으로 미리 기른 가축을 도살(이 때의 도살방법은
네다리를 묶어 열화 속에 넣어 목숨이 끊어진 후에 털을 뽑고 물로 씻어 낸 다음 배를 갈라 내장을
도려내고 내용물을 씻어 냄)하는 것 이외에는 궁중이나 일부 상류층 이외에는 육식을 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고려사 형법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은 12년(1325년) 2월에 내린 교서에서 소나 말을 도살하는 것은
대단히 인자하지 못한 일이다. 소와 말을 도살하는 자는 처벌하라고 하였으나,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자 나중에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소와 말의 도살을 단속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고려 성종은 이양의 상소를 받아 들여 소를 비롯한 가축의 암컷을 제사용으로 쓰지 말라고 하였
으며, 태조의 제삿날과 성종의 아버지 제삿날에는 5일간, 성종의 어머니 제삿날에는 3일간 도살과
고기반찬을 금하라고 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효도를 다하는 하나의 표시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고려 광종 19년(968년)에는 도살과 식육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며, 문종 20년에는 3년간
도살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는 교통용의 말과 농사용 소의 부족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불교의 살생금지
와 식육금단 사상이 어우러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도살을 업으로 하는 사람인 백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백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정은 원래 여진족으로 포로, 귀화인, 무단 월경자 들인 이민족 출신들로서 본관, 호적,
부역이 없는 자들로 화척, 수척, 양수척(무자리)이라고 하였으며, 걸식과 도둑질, 살인, 방화 등으로
사회를 어지럽히게 되어 조선 제3대왕인 태종이 도축을 업으로 하도록 하였으며, 조선 제4대왕인
세종이 이들을 화척이란 이름대신 백정(평민이라는 뜻)이라 칭하여 이들의 자존심을 높여 주었다고
하며, 이들의 생업은 소를 잡아 주는 일로 농사를 짓지 않았기에 농가에서 연 1회 현물로 그 댓가를
지급 받았는데 농사짓는 것보다 수입이 좋았다고 합니다. 참고로 고려시대에는 서울에 있는 도축장을
현방, 지방에 있는 도축장을 포주라고 불렀으며, 백정은 일반 민가의 소를 잡는 일을 맡았으며, 종묘
등 국가적인 큰 제사에 사용할 소를 잡는 일은 반인 또는 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었고, 문묘제사에
사용할 소를 잡는 사람은 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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